송광사의 지장전을 지나면 정면에 대웅전이 보인다.
그저 평활한 곳에 자리한 사찰이라 일주문에서 부터 좌우 사방을 살펴 보아도 그저 평지다.
 
대웅전 역시 평지에 기단을 몇 올려 쌓고 지은 것이라 그렇게 우람한 느낌은 없는 것 같다.

 
완주 송광사 대웅전(完州松廣寺大雄殿)
 
대웅전은 절의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보물 제1243호로 지정된 송광사의 대웅전은 국내 최대 크기의 석가여래 약사여래 아미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좌우에 목패, 천장에는 주악비천도11폭이 조성되어 있으며 기록에 따르면 조선 인조 14년(1636)에 벽암국사가 다시 짓고, 철종 8년(1857)에 제봉선사가 한 번의 공사를 더하여 완성하였다고 하는데 초창에는 2층이었으나 1857년도에 1층으로 되었다고 한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대웅전·의창군서’라고 쓰인 현판도 있는데, 의창군은 선조의 8번째 아들이며 광해군의 동생이다.
인조 14년(1636)에 세운 송광사개창비의 글도 의창군이 썼다.
현판은 이때에 쓴 것으로 보이는데 대웅전을 세운 시기를 아는데도 참고가 되고 있다.
다른 건물에 비하여 가운데 칸이 비교적 좁고, 문 위 벽면에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이 특징이다.
건물 안쪽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를 함께 모셔 놓았다.

 

화려한 단청과 겨울 하늘을 배경으로 그저 무심히 흔들리며 댕강거리는 풍경은 고즈넉한 산사에서만 느끼는 여유로움만은 아닌 것 같다.

 

우리나라 각 지역 사찰 마다 보물이나 문화재 한 두점 없는 곳은 없을 것이다.

특히 송광사는 고인돌 부터 시작해서 사찰 전역이 보물이거나 문화재 등 유물들로 가득하다.

 

뒤에서 바라본 대웅전의 모습이다.

화려한 단청에 깔끔하게 잘 정리된 주변은 세속의 때를 벗고 부처님세계에 든 이들의 마음처럼 정갈한 느낌이다.

그리고 보통은 대웅전의 좌우 문이 다 열리는 것인데 송광사에는 왼쪽은 잠궈두고 오른쪽으로만 출입을 하게 하였다.

송광사에서 자랑하는 대웅전의 내부를 촬영을 할까 하고 대웅전의 오른쪽 문을 여는데 마침 들어가려던 신도인지 종무원인지 모를 여성이 차갑게 내뱉는 한마디에 아연 실색할 수 밖에 없었다.

신도든 신도가 아니든 열린 공간이 대웅전일터...

들어 오지 말란다.

그리고 대웅전은 사진을 찍을 수 없단다.

ㅎ~~~

참 인심한번 고약한 절의 행사머리다.

 

그래서인지 대웅전 정면 문앞은 사람들이 그리 많이 다니지 않는지 사람의 자취가 별로 없다.

어디에 쓰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고생이 창연한 돌거북의 등에는 단 같은 것이 올려져 있다.

막새기와로 테두리를 한 작은 연못[?]들도 몇 있는데 겨울이라 연이 없어서이기도 하겠지만 대웅전의 크기에 비해 좀 초라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대웅전 좌측으로는 거창한 불사로 미륵불을 세우고 주변을 대리석으로 호화롭게 단장을 했는데...

이몸과는 취향이 맞지도 않지만 작은 연못과도 어울리지 않아 사진에 담지않았다.

 

송광사는 가람의 구조가 특이해서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 일직선상에 놓여있다.

그래서 대웅전에서 보면 일주문의 동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일주문에 문짝을 달아 놓은 것이 어쩌면 대웅전의 동정을 감추고자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음전근처의 처마 밑으로 아자형종각과 극락전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리 보기가 좋지않은 감시카메라가 쌩뚱맞은 흰색으로 무언가를 들여다 보고 있다.

건물의 색상과 잘 어우러지는 모양이나 색상으로 만들면 어떨까?

잠시 공허로운 생각이 머물다 사라진다.

 

송광사의 대웅전 앞에는 아[亞]자형 또는 십자형이라 불리는 범종루인 종각이 있다.

범종루는 다른 말로 종각, 범종각, 종루라고도 하는데, 범종과 법고, 목어, 운판 등 불교의 4물을 걸어놓는 누각을 말한다.

 

아[亞]자형 종각   

亞자형 평면 위에 다포계 팔작지붕을 교차시켜 십자형으로 짜 올린 2층건물이다.
종루나 종각은 보통 사각형 건물인데 비하여 여기서는 보궁에 즐겨쓰는 특수한 평면형식 즉, 亞자형을 택하고 있다.

위층은 마루바닥에 계자각난간을 두르고 계단 있는 쪽만 개방하였으며, 아래층은 흙바닥이며 완전히 개방되어 있다.

 

2층 누각 안에는 중앙에 종을 걸고, 사방으로 돌출된 칸에 종·북·목어·운판을 걸어서 기본 불구(佛具)를 다 갖추고 있다.

칸 사이는 모두 똑같이 8.15자(2.5m)로 소규모인데, 내외 3출목 포작을 주두 및 보간에 1구씩 짜올려 빈틈없이 지붕을 받게 하였다.

 

건물 크기에 비하여 공포대가 크고 화려해 보이는 반면, 가냘프게 휘어 올라간 앙서형 살미, 양끝이 사절된 교두형 첨차 등으로 인하여 세부는 섬약해 보인다.

겹처마 밑의 서까래와 부연 또한 다른 건물에 비해 가는고 섬세하다.

아름답게 치켜 올라간 추녀 곡선은 이 건물이 누각임을 그대로 보여준다.

2층 내부의 천정은 네 귀에서 짜 올라간 공포로 가득 채워져 있어서 특이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내부 천정 가구는 대들보 없이 창방이 대신 대들보 구실을 하도록 하였다.

단청은 모로단청이며, 내부 기둥 4개에는 용을 그려 장엄하고 창방의 계풍에도 수목화초를 그리고 있다.

이 건물에 걸려 있는 종은 1716년(숙종 42)에 무등산 증심사에서 주조된 것으로 1769년 (영조 45)에 중수되기도 하였다.

종합적으로 보아 이 건물은 대웅전을 1층으로 고쳐 지은 시기인 1814년 혹은 1857년에 세워진 것으로 판단된다.
「완주송광사종루」라는 이름의 보물 제1244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다. 


 

범종루의 사물은 예불의식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였다.

범종은 특별히 지옥중생들의 제도와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으며 법고는 축생을 제도한다.

목어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눈을 감지 않으므로 수행자로 하여금 물고기와 같이 항상 정진하라는 의미와 함께 물 속에 사는 중생들의 제도를 기원하는 것이다.

또한 운판은 날짐승들의 제도를 기원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송광사 범종루에는 범종이 둘 있다.

하나는 매달려 있고 다른 하나는 바닥에 내려져 있는데 둘다 사용하는 방법이 다를 뿐 사용하는 것 같은데 어느 것이 문화재인지는 알수가 없었다.

일반적으로 문화재 범종을 보관하려면 같은 모습으로 모사하여 만드는 것이 보통인데 두 범종의 모습이 확연히 다른 곳을 보면 그 용도가 다른 것 같기도 하다.

 

범종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38호)


1716년에 만들어진 범종은 전통 한국식을 따르고 있으며, 본래의 소속 사원이 적혀있고 조성연대가 분명하여 조선시대 범종연구와 前시대의 범종연구에 빠져서는 안될 귀중한 자료이다.

 

축생들의 제도를 위해 두드린다는 법고

 

수행자로 하여금 눈을 감지 않는 물고기와 같이 항상 깨어 있어 밤낮으로 정진하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범종루의 기단부는 자연석을 놓고 거기에 맞추어 기둥들을 깎아 세웠는데 기둥의 모양이 각진 것과 둥근것 등이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크게 공을 들여 다듬은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종각 뒷편으로는 관음전과 공양간이 자리하고 있다.

송광사관음전은 2층 건물로서 1층은 식당으로 사용되고 2층은 관음전으로 사용되었으나 2003년에 1층을 없애고 2층만을 옮겨 지금의 자리에 위치하게 되었다.


관음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으로 사찰에 따라서는 원통전, 대비전, 보타전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관음전에는 관세음보살과 더불어 그 협시로서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을 모시며 그 뒤에 주로 천수천안관세음보살도나 수월관음도 혹은 아미타 후불탱화를 봉안한다.

 

관세음보살은 관자재(觀自在), 광세음(光世音), 관세자재, 관세음자재라고도 번역되며 줄여서 관음보살이라고도 부른다.

관세음보살을 모신 관음전의 후불탱화에는 주존이 관세음보살이 되고 그 협시로서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이 등장한다.

관음탱화 역시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모셔지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 성관음과 십일면관음, 천수천안관음 등을 들 수 있다.

성관음은 온몸을 백의로 덮고 있거나 대체로 천의를 입고 있다.

또한 천의를 입은 위에 투명한 사라를 머리에만 덮기도 하고 전신에 너울처럼 덮은 경우도 있으며 보관을 쓰고 있다.

 

십일면관음 보관에는 11면의 얼굴이 묘사되어 있는데, 전후좌우 10면의 얼굴은 보살의 수행단계인 10지를 상징하고 맨위의 얼굴은 부처님의 상호로서 부처님의 과위(果位)를 나타낸다.

우리 나라에서 조성된 십일면관세음보살상의 대표적인 모습은 석굴암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여러 가지 인간의 재앙에 대하여 더욱 적극적인 구제의 의지를 담고 있는 관음상이 바로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라 할 수 있다.

천수천안관세음은 천개의 눈과 천개의 손을 가졌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천개의 눈과 손을 가졌다는 것은 세간을 살피고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눈과 손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천수천안을 형상화 할 때는 정상적인 두 손 이외의 손들을 마치 광배처럼 등 뒤에 원형으로 안배하고 각각의 손바닥 위에 눈을 그려 천안을 표현한다.

관음탱화의 구도를 살펴보면 고려시대의 관음상들이 측면을 바라보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에 비해 조선시대의 수월관음도는 거의가 정면관을 취하고 있다.

관세음보살은 중앙에 화불이 장엄되고 수많은 구슬로 장식된 매우 화려한 화관을 쓰고 있는데, 그 장식이 어깨까지 내려오고 거기서부터 영락장식이 다시 천의를 따라 발 아래까지 늘어져 있어 장식적인 의도가 두드러진 화풍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가슴에서부터 대좌까지 구불거리며 내려오는 천의의 복잡한 흐름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데,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고 짜임새 있는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날 너무 급작스레 길을 나서는 통에 아침을 거른 나는 허기가 지는 통에 볼것조차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혹시나 하고 절의 공양간을 기웃거려 보았는데 공양시간이외에는 음식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섭섭하기는 했지만 나름 규율을 잘 지키는 절 같다는 느낌은 받았다.

ㅎ~~

 

대웅전을 가운데 두고 관음전 맞은편 약간 높은 자리 수목 사이에  세심정이 자리하고 있다.

언제 지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정진 중 더러는 탁해지는 마음을 닦는 곳인듯 사방이 트인 말 그대로 정자다.

뒤로 보이는 건물이 대나무로 둘려진 것이 선방인 모양이었다.



하나 하나 짚어 가다 보니 자꾸 글이 길어진다.

 

이제는 삼성각과 나한전의 소개만 남은 것 같다.

다음으로 계속 이어진다.

:


1월의 마지막 날...

급작스런 블로그 이웃의 방문으로 부랴 부랴 몇 블로그 이웃들이 모여 전북 완주로 향했다.
굳이 장소를 정한 것은 아니지만 그저 차안에서 천년 고찰 송광사로 의견이 모아졌다.
 
 
송광사[松廣寺]  063-243-8091

송광사는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에 있는 전통사찰로서 신라 진평왕 5년[583]에 터를 잡아, 경문왕 7년[867]에 구산선문 중 도의국사의 가지산파 제3조인 보조국사 체징[804~880]에 의해서 개창되었다고 한다.
 
그 후 거의 폐사가 되어 가는 것을 고려 보조국사가 순천 송광사를 개창한 후 제자들에게 본사를 복원·중창할 것을 부탁하고 수백년이 지난 조선 광해군 15년(1622:임술)에 덕림 스님을 중창주로 설두하여 웅호, 숭명, 운정, 득신, 홍신 등 보조국사 제자들이 복원·중창하게 되었다고 한다.
 
고려 보조국사의 뜻을 쫓아 덕림스님 등이 뜻을 내고 벽암각성대사를 통해 복원·중창했다.
사찰의 복원중창의 의미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의해 피폐해진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적 결집력을 공고히 하는데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명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헌세자와 봉림대군이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오기를 기원하고 병자호란시 전주사고(왕조실록)를 지키기 위하여 승군 700명을 배치하였던 곳이며 국난으로 희생된 일체 영가들의 왕생극락을 발원했던 곳으로 민족의 역사적 영욕을 함께했던 호국도량이기도 하다.
 
 
송광사[松廣寺]에 와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보기 드문 가람의 전각 배치이다.
가람의 배치가 특이하게도 일주문에서 금강문사이의 거리가 여느 가람과 다르게 짧기도 하지만
일주문에서 천왕문 대웅전이 일직선 상에 놓이는데 그래서 일주문에서 바라보면 대웅전의 현판까지 그대로 보이는 구조이다.
그리고 일주문에 속가의 집들처럼 문이 달려 있고 좌우로 담장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 또한 남다르다.
 
 
일주문은 온갖 번뇌망상을 지우고 깨달음을 향한 일념으로 들어선다는 의미이며 흔히 ‘산문’이라고도 하는데 산사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문으로써 절 이름의 현판이 걸려 있는 것이 보통이다.
기둥이 한 줄로 서 있다는 데에서 일주문이란 이름이 유래하였으며 한 마음으로 구도에 정진한다는 뜻도 담겨 있다.
일주문을 기준으로 해서 승과 속의 경계가 이루어지며 세간과 출세간 생사윤회의 중생계와 열반적정의 불국토로 나누어진다.
 
 
일주문은 송광사 가람배치 종축선상의 가장 남쪽에 위치하며 좌우로 담장이 연결되어 있다.
송광사의 정문으로 아래위의 굵기가 다른 굵직한 기둥 2개를 세워 하부구조를 형성하고 그 위에 다포맞배지붕을 얹은 소규모 건물이다.
정면 평방에는 주지 서암(瑞岩)스님이 불기 2518(1975)년 "終南山 松廣寺"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공포는 앞뒤 3출목으로 보 위에는 공포 1구, 좌우 기둥 위에는 주두 없이 각각 귀포를 두었다.
첨차는 마구리와 밑면이 사절되어 있고, 살미는 앙곡이 크로 끝이 날카로운 앙서와 수서로 구성되어 있다.
 
장엄 요소로는 정면 어칸 공포 아랫몸과 기둥 위 보뺄목 위치에 설치한 요두 조각이 있다.
섬약하고 힘이 빠진 살미, 목을 길게 빼어 맥빠진 듯한 모습을 보이는 용두 등은 이 건물이 20세기에 19세기말 건물을 모방하여 지은 것임을 보여준다.
사전(寺傳)에 의하면 이곳의 일주문은 원래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이곳으로부터 약 3km 떨어진 나드리(현재 무주, 진안방면의 도로입구)라는 곳에 서 있었는데 1814년(순조14년) 지금의 조계교가 있던 곳에 정중 스님에 의해 옮겼다가 다시 1944년 해방되기 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하며 1953년에 주지 서암스님이 지었다고 한다.
이 일주문은 1971년 12월 2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4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하고 있다.
송광사는 본래 白蓮寺(백련사)라 불리워 800동의 당우와 600승려들이 살아 16방사가 즐비하여 16방주(주지)가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가 대단했으리라 짐작된다.
 
 
송광사[松廣寺] 일주문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좌.우측에서 반겨 주는 것이 편안한 모습의 장승이다.
 
본시 장승이란 돌로 만든 석장승과 나무로 만든 목장승이 있으며, 고대의 성기(性器) 숭배에서 나온 것,
장생고(長生庫)에 속하는 사전(寺田)의 표지(標識)에서 나온 것,
목장승은 솟대[蘇塗]에서, 석장승은 선돌[立石]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한 기원은 알 수 없지만,
장승의 기능은 첫째 지역간의 경계표 구실, 둘째 이정표 구실, 셋째 마을의 수호신 역할이라 볼 수 있다.
보통 남녀로 쌍을 이루며,
남상(男像)은 머리에 관모를 쓰고 전면에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상원대장군(上元大將軍)'이라 ,
여상(女像)은 관이 없고 '지하대장군(地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 '하원대장군(下元大將軍)' 등의 글을 새기며,
장군명에는 민속적인 신명(神名)으로 동쪽에 있는 장승에는 동방청제축귀장군(東方靑帝逐鬼將軍),
서쪽에는 서방백제축귀장군(西方白帝逐鬼將軍), 남쪽에는 남방적제축귀장군(南方赤帝逐鬼將軍),
북쪽에는 북방흑제축귀장군(北方黑帝逐鬼將軍)이라고 세겨 축귀하는 민간 신앙의 성격을 나타내기도 하며
장승을 서낭당·산신당·솟대와 동등한 것으로 인정하여 액운이 들었을 때나 질병이 전염되었을 때에는 제사를 지냈다.

또한 장승의 명칭도 여러 가지로 조선시대에는 한자로 '후(堠)', '장생(長栍)', '장승(長丞, 張丞,長承)' 등으로 썼고,
지방에 따라 장승·장성·벅수·법수·당산할아버지·수살목 등의 이름이 있는데 가람안에 장승이 있는 점도
 송광사[松廣寺]의 특이한 점이라 할 수 있다.
 
 
좌측 장승의 뒤로는 묘하게 생긴 고인돌이 보이는데 송광사 안내판을 보면 가람안에는 수 많은 고인돌이 있다고 하는데 왜 하필 고인돌이 있는 곳에 절을 지은 것인지 아니면 고인돌을 옮겨 온 것인지 그 유래가 궁금 하였다.
 
 
그리고 우측 장승 뒤로는 쾌불 등 걸개그림을 걸던 장대초석이 있는데 소실되어서인지 하나만 남은 것이 안타깝다.
 
 
일주문에서 몇 발짝을 옮기면 금강문을 만나게 되는데 금강과 같은 단단한 지혜로 번뇌 망상을 제압하는 금강역사를 모신 송광사의 두번째문이다.

금강문은 사찰에 따라 인왕문이라고도 하는데 부처님의 가람과 불법을 수호하는 두 금강역사가 지키고 있는 문이다.
그 가운데 왼쪽을 지키고 있는 분은 밀적금강이고 오른쪽을 지키고 있는 분은 나라연금강이다.
밀적금강은 입을 벌리고 있고 나라연금강은 입을 다물고 있어 합쳐서 우주만물의 처음이자 마지막을 상징하는 신성한 진언인 옴을 나타내고 있다.
이들은 제각기 상체를 벗어 젓힌 채 손에는 금강저를 들고 매우 역동적인 자세들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불법을 훼방하려는 세상의 사악한 세력을 향해 경계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편 밀적금강과 나라연금강이 각기 다른 신격인지 아니면 동일한 신격을 두 몸으로 나누어 놓은 것인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금강역사란 본래 어원적으로 볼 때 금강저를 손에 쥔 자라는 뜻으로 ‘집금강신’ 혹은 ‘금강수’라고도 번역되는 것은 그 때문인데, 밀적금강과 나라연이란 말은 금강역사의 성격을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이다.
즉 ‘밀적’은 자취를 드러내보이지 않는다는 성격을 나타내고 ‘나라연’은 힘이 몹시 세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금강문은 송광사 가람배치 종축선상에 놓인 건물로 일주문의 북쪽, 천왕문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맞이하게 되는 금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다포계 팔작집 목조건물이다.
천왕문보다 규모가 작은 반면 외부 공포를 3출목으로 놓고 팔작지붕을 얹은 결과 오히려 천왕문보다 더 장중한 외관을 이루고 있다.
정면 가운데칸은 통로이고 좌우칸은 금강역사상의 봉안 공간인데, 통로에 면한 쪽에는 홍살 칸막이를 설치하여 역사상의 가슴 윗부분만 볼 수 있게 하였다.
정면과 배면의 좌우칸 및 측면은 모두 벽체로 막아서 역사상의 감실을 구성하였으므로 내부는 무척 어둡다.
천왕문에서 고창을 두어 채광을 했던 것과 다르다.
한편 정면 및 배면 좌우칸의 벽체는 중방으로 상하 양분하고 중앙 윗벽만 다시 중앙에 살대를 세워 양분한 다음 각 면에 신장도를 그렸다.
 
공포 부재의 표현에서 보이는 양식적 특징들은 19세기말 이후에 유행한 것인데 사전(寺傳)에 의하면 1950년대에 나서암(羅瑞岩) 스님이 건립했다고 전한다.
금강문은 금강역사상 2구가 좌우에 배치되어 있으며 좌측동자상은 사자, 우측동자상은 코끼리를 타고 있으며 금강역사상 2구 및 동자상 2구 모두 소조로 만들어졌다.
1999년 7월 9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173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다.
 
 
금강문을 지나면 사천왕문인 천왕문이 나오게 되는데 중생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 살피고 인도하는 사천왕을 모신 곳으로 사천왕상이 소조로 조성되어있으나 목조가 가지는 섬세함과 따뜻함을 가지고 있다. 
 
천왕문은 송광사 배치 종축선상에 위치해 있으며 금강문 북쪽, 대웅전 남쪽에 위치해 있다.

 
문은 정면 3칸, 측면 3칸인 단층 익공맞배집 건물이다.
내부 좌우칸에는 천왕2구씩을 서로 마주보도록 배치하고, 정문 가운데칸은 통로로 사용할 수 있도록 평면을 구성하였다.
정면에서 보면 가운데칸에는 2짝 판문이 달려 있어 여닫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문인방 위에 홍살을 설치하였다.
좌우칸에는 벽의 높이 3/4 부분에 상방, 1/4 부분에 하방을 설치하여 벽을 3분할하였는데 상방 위에는 정자살고창, 상방과 하방 사이에는 판벽, 하방 밑에는 벽체를 각각 설치하였다.
 
측면은 모두 벽체로 막고 박공 부분에는 널판을 내려 측면 지붕 가구를 가렸다.
그런데 측벽 상부 양끝 윗부분은 천정 서까래와의 사이에 약간 틈을 두고 측광(測光)이 천왕상 머리 뒤에서 스며들어 오게 하였다.
천왕문은 통로 좌우에 사천왕상이 2구씩 모셔져 있는데 모두 소조로 조성되었다.
 
 
개창비문 비음기의 화사질(化士秩)에 의하면 ‘天王門’이라고 적혀 있어서, 사천왕을 모신 건물이 개창 당시에 지어졋으며 호국 신앙적으로 중대한 의의가 있어서 인지 ‘門’이라 하지 않고 격을 높여 ‘殿’이라고 부른 점이 주목된다.
전면에는 천왕문으로 후면에는 천왕전으로 각각의 현판 표기가 다르다.
 
 
사천왕문에 있는 사천왕상은 1997년 6월 12일 4구 모두 보물 제1225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하고 있다.  
 
1994년 사천왕상을 개채하면서 북방 천왕 우측 머리끈에서 발견된 명문에 의하여 사천왕상이 1649년에 조성되었음이 확인되었으며,
문은 1636년 이전에 만들어 놓고 상은 나중에 조성·봉안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송광사의 사천왕상은 절대년도가 정확해 이전의 사천왕상과 이후의 사천왕상의 시대상을 알려주는 나침반 역할을 하고 있어 국내의 사천왕상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
다문천, 비사문천왕 (毘沙門天王)   - 팔부중: 야차, 나찰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은 수미산 중턱의 북쪽 영역을 관장하는 천왕(天王,Deva)이다.
범어로는 Vaisravana라고 하며, Vai는 두루(遍, 普)의 뜻을 가지고, Sravana는 듣는다는 뜻으로, 두루 많이 듣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다문천왕은 수미산 북방을 지키면서 부처님의 설법을 가장 많이 들었다고 하는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고대 인도의 아타르바 베다에서는 지국천왕이 암흑계에 머무는 악령의 우두머리로서 재물과 복덕을 주관하는 존재로 표현되어 있다.
 
다문천왕은 권속으로 야차, 나찰을 부리는데, 야차는 행동이 민첩하고 가벼우며 음악과 환락, 음식, 오락, 바람을 주관하며 숲속이나 묘지, 골짜기에 산다고 하며, 나찰은 '두려운 존재'라는 뜻으로 혈육을 먹고 탐내는 존재라고 한다.
다문천왕은 불교에 흡수되면서 야차와 나찰을 부하로 부리면서 부처님의 설법을 가장 많이 듣고 불법을 수호하는 존재로 변화되었다.
 
다문천왕의 지물에 대해 말하자면, 다라니집경에는 왼손에 창을 잡아 땅을 짚고 오른손에는 불탑을 든다고 한다.
일자불정륜경에는 왼손에 창, 오른손에 금강저를 든다고 하고, 약사여래유리광칠불본원공덕경에는 왼손에 막대, 오른손에 탑을 든다고 하며, 그리고 음악과 환락의 상징으로 비파를 들기도 하는데 어둠 속을 방황하는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으로 더러는 얼굴이 검은색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송광사에는 비파를 든 모습으로 근래 라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동방지국천왕(東方持國天王)

동방지국천왕은 수미산의 동쪽을 지키는 신으로서 범어로는 드리타라슈트라라 하는데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뜻이다.
음역하여 제두뢰타(提頭賴咤)가 되고, 한역하여 지국천왕(持國天王)이라 불린다.
16선신의 하나이기도 한 지국천왕은 부처님의 정법을 받들어 남(南) 섬부주의 동방을 지키며 항상 선한 자에게 상을 주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어 인간을 고루 보살피며 국토를 수호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한다.
[화엄경소]는 동방지국천왕의 세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동방국은 수미산 동쪽 산중턱에 있는데, 이름이 유건타라 한다.
바닥에서부터 무려 4만 2000유순(由旬, yojana: 소달구지가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로서 80리를 대유순, 60리를 중유순, 40리를 소유순이라 한다.)이나 되는데, 이곳에 지국천왕이 거주한 성이 있다.
이 성의 이름은 현상(賢上)으로서 사방이 6000유순에 이르고, 담장과 난간, 그물 등이 각각 일곱 겹으로 둘러져 있다.
또한 궁궐은 금, 은, 붉은 진주 등 칠보로 장식되어 있으며 사면에는  각각의 성문이 있고 문마다 누각과 망루가 있으며 그 안의 정원에는 연못과 온갖 꽃이며 기이한 나무들과 과일들이 형용할 수 없는 각종 향기를 풍기고 있다.
온갖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는 슬프면서도 아름답기 짝이 없다.”
 
동방지국천왕의 임무는 이처럼 아름다운 나라를 수호하는 것이며 부처님의 정법을 받들어 남섬부주의 동방을 수호하고, 아울러 세 가지의 사악한 길(三惡道)을 없애고 세 가지의 선한 길(三善道)을 더욱 조장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부처의 뜻이라 했다.
동방지국천왕은 권속으로 술과 고기를 일절 먹지 않고 오직 향기만을 맡는 음악의 신 건달파와 사람의 정기만을 뺏는 귀신 비사사를 거느리며 큰 위덕이 있다.

한편 동방지국천왕을 상징하는 지물에 대해서는 7세기 중엽에 한역된 <다라니집경>에 따르면 왼손을 내려뜨려 칼을 잡고, 오른 손은 팔을 굽혀 앞으로 향해서 손바닥을 올려 보(寶)를 쥔다 하였고, <일자불정륜왕경>에서는 왼손은 창을 잡고 오른손은 손바닥을 올려든다 하였다.
그런가 하면 <만다라  도상집>에서는 얼굴은 육욕색의 분노형이고 왼손은 칼을 잡고 오른손은 넓적다리 위에 댄다고 하였다.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
용, 비사사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수미산 중턱의 서쪽에 주처(住處)가 있는 천왕(천왕, Deva)이다.
범어로는 Virupaksha라고 하며, 그 뜻은 이상한 눈, 추한 눈을 의미를 가진 것으로, 그래서 한문으로는 추목(醜目), 악안(惡眼)이라고도 하며, 일반적으로는 광목천왕이라고 불리어진다.
광목천왕은 고대 인도에서 시바(Siva) 신의 화신으로서 세 개의 눈을 가진데서 유래한다.
 
광목천왕의 권속은 용과 비사사이다.
용은 본래 인도에 사는 용 종족들이 뱀을 숭배하는 신화에서 나온곳으로 신력이 있어 구름과 비를 변화시킨다고 한다.
비사사는 식혈육귀(食血肉鬼)라고 번역하며 아귀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한손에는 용을 잡고, 다른 한손에는 여의주를 잡은 형태가 일반적이다.
 
 
남방증장천왕(南方增長天王)

남방증장천은 수미산의 남쪽에 살면서 남섬부주의 중생을 관찰하고 제도하는 천신이다.
그는 위덕을 증가시켜 만물이 태어날 수 있는 덕을 베풀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하여 범어로 증장을 뜻하는 비루다카이며, 음역하여 비루녹차(毘樓녹叉), 한역하여 증장천왕(增長天王)이라 한다. <장아함경>은 이렇게 적고 있다.

“이 천왕이 사는 곳은 수미산의 남쪽 유리타로서 1000유순 거리에 남방증장천왕의 성이 있는데 선견(善見)이라 부른다.
이 성곽은 사방이 6000유순이며 일곱 겹으로 된 난간과 그물로 되어 있고 모든 장식이 칠보로 꾸며져 있으며 무수한 새들이 어울려 우는 소리 또한 슬프고 아름답다.”
 
이토록 장엄한 국토를 지키고 증장시키는 것이 바로 남방증장천왕의 역할이다.
각 천왕들은 8명씩의 장군들을 거느리는데, 특히 남방증장천왕의 아장(亞將)인 위태천(韋太天)은 사천왕 휘하 32장군의 수장으로서, 석가모니가 입적할 때 부처님의 뜻을 받들어 출가인을 보호하고 불법을 수호하는 임무를 떠맡았다.

남방증장천왕은 권속으로 귀신 구반다와 피려다를 부리는데, 구반다는 비사사처럼 사람의 정기를 빼앗는 귀신이고, 피려다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부리는 귀신이다.
남방증장천왕의 아들 91명 또한 큰 신력이 있다.

남방증장천왕의 지물에 대해서는 <일자불정륜왕경>에 따르면 오른손은 허리에 대고 왼손은 창을 잡는다 했고 <다리나집경>에서는 왼팔을 내려서 칼을 잡고 오른손으로 창을 드는데 창끝은 땅에 닿게 한다고 했다.
이로써 증장천왕은 전통적으로 창을 지물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만다라 도상집>에서는 얼굴은 적육색(赤肉色)의 분노형이며 갑옷 위에 천의를 두르며 오른손에는 검을 쥐고, 왼손은 주먹을 쥐어 허리에 댄다고 했다.
하지만 이곳 송광사에는 오른손에는 창을 세워 들고 왼손에는 보탑을 들고 있다.
 
아래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의 손에 잡힌 용의 모습이 고통스럽거나 전혀 반항하는 모습이 아니라 재미있다.
 
 
사천왕문을 나서면 오른쪽으로 극락전이 나타난다.
 
극락전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68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하고 있으며 지옥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을 세운 지장보살과 시왕상을 모신 곳이다.
 
 
극락전을 비켜 좀 더 지난 쪽에는 지장전이 있다.

지장전은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으로 국내 최대규모라고 하는데 일반 사찰의 대웅전 정도의 규모이다.
지장보살을 주불로 하여 좌우에 무독괴왕과 도명존자를 배치하고 있으며 이 밖에 시왕 및 동자상이 모셔져 있고 영가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만년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지장전은 명부전이라고도 하며 정면 3칸, 측면 3칸인 단층 맞배집 건물로 공포를 사용하지 않고 대들보 위에 바로 도리를 얹은 단순한 구조로 되어있다.
내부 3면 모두에 존상을 배열하기 위하여 3면은 창호 없이 판벽으로 마감되어 있으며 정면에만 3칸 모두에 띠살문과 띠살창을 두어 채광과 통풍에 대비하였다.
어칸에는 궁판이 있는 4짝 띠살문을 달아 밖으로 열고 닫도록 하였으며 문 위쪽에 고창(高窓)을 둔 점이 특이하다 하겠다.
좌우칸은 벽체 1/3 높이에 중방을 가로지르고 그 위에 키 큰 3짝 띠살창을 고창 높이까지 설치하였으며 중방 아래는 벽체를 2분하여 최근에 벽화를 그려 넣었다.
측면은 몸체 부분을 판벽으로 막되, 높이 2/3지점에 상방을 가로지르고 그 위를 3분하여 벽화를 그려 넣었다.
상방 아래쪽은 판벽으로 앞퇴칸과 뒤퇴칸의 면분할을 달리하여 단조로움을 깨뜨리는 디자인을 하였고 박공 부분은 널판으로 가렸다.
귓기둥에 평주보다 굵은 원주를 사용하여 구조적 안정을 취한 것은 나한전과 마찬가지이다.
 
 
이제 송광사의 초입을 넘어섰다.
호남 벌판의 야트막한 산자락 끝에 위치한 가람이라 그런지
전체의 건물이 높낮이가 거의없이 펑저한 바닥에 조성되어 있어 노약자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다음에는 대웅전을 비롯해 아[亞]자형 종루와 나머지 부속건물의 소개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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